에우아틀로스라는 사람이 프로타고라스(기원전 485~414년경)에게 수업을 받기로 했다. 그는 프로타고라스의 수업료가 바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수업료를 내지 않으려고 처음부터 이런 조건을 스승에게 내걸었다.
“내가 첫 번째 고공 사건에서 이기게 되면 스승의 가르침이 참된 가르침이라는 것이 증명되니 그때 수업료를 내겠습니다.”
프로타고라스는 약속을 받아들이고 그를 가르쳤다. 수업이 다 끝난 후에 프로타고라스가 수업료를 요구하자 제자 에우아틀로스는 수업료가 터무니없이 비싸다며 첫 번째 소송 상대자로 스승을 법정에다 고소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내가 소송에서 이기면 비싼 수업료를 내지 않아도 되고, 지면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니 수업료를 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자 프로타고라스는 눈도 꿈쩍 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에우아틀로스여, 그대는 어떻게든 수업료를 내지 않고는 못 배길 걸세. 자네가 진다면 패소했으니 법의 심판대로 내게 수업료를 내야 할것 아닌가? 반대로 자네가 승소했다고 하세. 그러면 약속대로 수업료를 내야 하지 않는가?”
프로타고라스는 돈을 받고 강의하는 관습을 그리스에 처음 도입한 사람이라고 한다. 플라톤은 <메논>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프로타고라스라는 사람을 알고 있는데, 그는 자신의 지혜를 팔아, 아름다운 훌륭한 작품들을 만든 페이디아스와 열 사람의 조각가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
프로타고라스는 그리스 북부에 있는 압데라라는 도시에서 기원전 485년경에 태어났다. 이 압데라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바보들의 도시’라고 불렸던 곳이다. 그런데 이 ‘바보’도시는 아이러니하게도 두 명의 ‘지혜로운 자’를 배출해냈다. 한 사람은 사람들이 ‘지혜’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데모크리토스이고, 다른 한 사람은 스스로를 소피스트, 즉 지혜로운 자라고 불렀던 프로타고라스였다.
자신이 만든 법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철학자
프로타고라스는 소피스트 생활을 서른 살쯤부터 시작하여 40여 년동안 그리스의 여러 고시를 방문했다. 특히 그는 아테네를 자주 방문했다. 그가 아테네에 처음 온 것은 기원전 450년 이후다. 그는 아테네에서 페리클레스와 친분을 쌓았다.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44년에 남부 이탈리아에 투리오리라는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그는 프로타고라스에게 이 도시의 헌법을 제정해달라고 위촉했다. 그가 만든 헌법은 규형 잡힌 민주주의였다. 그가 기초한 헌법은 토지 소유의 법적인 제한을 통해 중산층을 보호하고, 모든 시민의 자식들에게 의무적인 교육을 시키며, 국가가 교육적 부담을 지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국가 철학자’라는 칭호를 얻었고, 기원전 445년에서 443년까지 투리오리에 머물렀다.
프로타고라스는 40여 연 동안 소피스트로 살면서 열두 권 정도의 책을 남겼다. 그러나 현재 그 책들은 남아 있지 않으며, 제목과 단편만이 남아 있다. 프로타고라스는 교제에도 능하고, 궤변에도 능했다고 한다. 그는 최초로 글의 기본형을 기원문,의문문, 응답문, 명령문의 네 가지로 분류했다고 한다. 문장에 대한 이런 지식은 그가 언어 논리에 해박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소크라테스적 논의 방법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최초로 도입한 사람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어떤 제안에 대해 이를 반박해 논의를 진행해가는 문답법적 추론을 최초로 제시해 선보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이자 소피스트로서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것은 프로타고라스가 다음과 같이 말할때였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존재하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들의 척도요, 존재하지 않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척도다”
<DK 80 B1>
여기서 프로타고라스가 말하는 인간은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 개별적 인간이다. 인간은 각기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보고 세상을 해석한다. 따라서 세상에 대한 관점은 절대적일 수 없고 다양하며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프로타고라스의 이 주장을 볼때, 진리는 상대적이고 불가지론적이며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런 입장은 진리는 하나고 절대적이라는 입장에서 오랫동안 비판을 받아왔지만, 현대 철학의 경향은 오히려 프로타고라스의 입장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프로타고라스가 일흔이 됐을 때 아테네 시민들이 그를 고발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어느 날 그는 친구인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의 집에서 자신이 쓴 <신들에 대해서>라는 저서에서 신들의 존재를 알 수도 없고, 인간은 그것을 파악할 수도 없다라고 스고 낭독했다. 그러나 아테네 시민들은 그의 말을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했다.프로타고라스는 아테네 법정에 출두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재판 결과를 뒤집지 못한 그는 도주 이외의 다른 묘수를 생각해내지 못한 것 같다. 그뒤로 그의 죽음에는 여러가지 설이 전해져온다.
—————————— 이동희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철학이야기> 에서